경희궁, 덕수궁,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Tommy's travel

1. 경희궁

경희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별궁으로 광해군 때 건축되어 270여년간 궁으로써 사용되었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잠시 사용하던 행궁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궁에서 정사를 보아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며 중요시되었다.
원래 경희궁 자리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던 정원군 소유지였는데 이 곳에 왕기가 있다는 풍수의 말을 믿고 강제로 빼앗아 왕기를 누르기 위해 광해군 8년(1616)에 착공하여 광해군 12년(1620)에 완공 경덕궁이라 했다가 후에 영조의 왕명에 의해 이름을 경희궁이라 했다.

2. 덕수궁

덕수궁은 원래 궁터가 아니었다. 태조의 계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태종 때 이 능이 옮겨지고 그 자리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집을 지어 살았다. 이후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비롯해 대부분의 궁궐들이 타버려 의주(義州)까지 피난 갔다가 되돌아온 선조가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선조가 1608년 2월에 지금의 즉조당에서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덕수궁은 왕궁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잠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되돌아 오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반목을 하면서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만을 남겨두고 창덕궁으로 옮기고,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면서 경운궁을 '서궁(西宮)'이라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조당에서 즉위하면서 왕궁은 이곳에서 완전히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덕수궁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종 말년이다.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되자 고종이 아관파천하여 러시아 공관옆에 있던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는데, 석조전 ․ 정관헌 같은 서양식건물도 이때 지어졌다.
1908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창덕궁으로 옮겨가고 이곳 경운궁에 홀로 남게 된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3. 경복궁

경복궁은 너무나 잘 알려진 조선조의 제일 궁궐.태조 4년(1395년)창건되었는데 경복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임진왜란(1592)때 불타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고종2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고 현재는 일본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옛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경복궁은 정문격인 광화문,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사신들을 맞았던 근정전, 침전으로 쓰였던 강령전,왕비의 처소인 교태전, 후원인 경회루,향원정그외에도 지선당,집경당,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복궁은 한 왕조의 궁이면서 찬란한 문화의 집결체라 할 수 있을만큼 역사적으로도 유서깊고 건축학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도 그 가치가 높다. 그래서 찬찬히 둘러보면 경복궁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다. 광화문 해태조각상,근정전 기단에 조각된 방위신상,경회루 다리 및 영재교의 석교에 설치된 석조조각물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최대의 미술품으로 손꼽힌다

4. 창경궁

창덕궁과 비원을 사이에 두고 동쪽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 전기인 성종(1469-1494)때 지은 궁이다. 왕이 집전을 하던 궁궐이 아니라 왕가의 사람들이 쉬기 위해서 지어진 별궁이었다.
창경궁이 있는 자리는 본래 조선 3대 왕이었던 태종 이방원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들의 왕권을 가까이서 지켜주기 위해 지은 수강궁 자리다. 태종은 자신이 형제들과의 권력다툼을 통해 왕권을 장악했던 것을 되새겨 셋째아들인 세종이 왕권을 확고히 다질때까지
지켜주고하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창덕궁에 있었고,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는 그 옆 수강궁을 짓고 거처하였던 것이다.
그후 태종이 죽자 수강궁은 비게 되었고 세종마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겨 가면서 그 쓰임새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수강궁은 단종(1452-1455)이 잠깐 거처한 적이 있으며 세조(1455-1468)가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예종(1468-1469)이 여기서 즉위하였다.
수강궁이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성종때다. 이름도 이때 창경궁이라 고쳤다. 그러나 이때도 집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대비(大妃)들을 이곳에 사시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즉 창경궁은 돌아가신 선왕의 여러 왕비들이 왕궁 안에서 왕과 함께 거처하는 것이 불편하여 왕궁 밖의 장소에서 살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성종은 새해와 동짓날에 대비전에 문안을 올리고 나서 명정전에서 백관의 조회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명정전이 조회를 받는 정전으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명정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문정전은 신하들과 정치를 논의하는 편전이었다. 명정전 뒤쪽에 동쪽으로 비켜 서 있는 통명전과 경춘전은 대비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뒤로는 창덕궁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이 후원을 통해 나 있었다.

창경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본궁으로 사용되면서 부터다. 왕자들이 주로 창경궁에 거처하면서 창경궁이 자연스레 왕비들의 권력암투장이 되어서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곳 창경궁 취선당이며,영주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던 곳도 창경궁 선인문 안뜰이었다.

창경궁은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순종에 의해 창경원으로 격하되면서 일종의 공원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1983년에 이곳에 있던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금의 과천 서울공원으로 옮겨가면서 다시 궁궐로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창경궁에 남아있는 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명정전을 비롯해 그 회랑과 그 앞문인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때 다시 지은 숭문당·함인전·환경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 등의 내전이다.


5. 창덕궁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궁은 경복궁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많은 왕들이 집정을 했던 곳은 창덕궁이다.임진왜란때 경복궁이 타 버린 이후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복원하기 전까지 270년 간 대부분의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보았다. 창덕궁이 지어진 것은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에 의해서다. 왕이 휴식을 위해 만든 별궁으로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궐로 불리웠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본궁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때문에 실제로 왕실사람들의 생활상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곳이 이곳 창덕궁이다. 한일합방의 조인식이 열린 곳도 이곳이고,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머물렀던 곳도 이곳이다. 마지막 왕비였던 이방자여사와 덕혜공주 또한 이곳 낙선재에서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가장 최근까지 사용된 궁궐인 탓에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궁궐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경복궁을 제치고 창덕궁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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